https://www.mk.co.kr/news/culture/11137036
매경 김유태 기자가 한강 선생님이 노벨문학상을 타실 줄 전혀 모르고
당일 아침까지 메일을 나누었다는 인터뷰 기사
저녁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나서 얼마나 소름이 끼쳤을까.
상상만 해도 정말 짜릿한 기분
선생님의 과거 영상을 보고 낭독회를 보고 있으면
작품 전체가 선생님과 어우러져 작가 마저도 하나의 작품이 되는 느낌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소설 쓰다보면 부담 사라져
내 소설은 질문에 대한 소설
질문의 끝 다다르는 그 순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돼
지금은 일요일 새벽(6일)이라 창 밖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고요합니다. 최근까지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었고 지금은 유디트 샬란스키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과 루소의 ‘식물학 강의’를 번갈아 읽고 있습니다. 사이사이 문예지들도 손 가는 대로 읽고요. 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짧든 길든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일이 늘 어렵다 보니 아마 부담이 들어올 자리가 남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샘터’에 입사해 일하던 때 영종도로 직원 수련회를 갔는데, 해질 무렵 썰물이 빠져나간 모래펄에 녹슨 닻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 풍경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단편집 ‘여수의 사랑’에 묶인 소설들을 쓰던 시기에는 고단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떠나기를 몰래 꿈꾸고, 저마다 홀로 피로와 시련을 감당해내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저에게 소설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어진다기보다는 질문들이 이어지는데요. 어느 시기에든 골몰하는 질문이 있고, 그 질문을 진척시켜보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됩니다.
대답을 찾았다기보다는 그 질문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되고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채식주의자’는 ‘내 여자의 열매’를 변주한 소설이지만, 보통은 새로운 소설을 쓸 때 옛 소설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써놓고 나서 예전의 소설과 연결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쓰고 나서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소설의 사이를 이루는 20여 년 동안 저는 자연인으로서 무척 많이 변했고 소설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점은 변하지 않았고 그것이 저 자신의 핵심에 속하는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민을 매번 다른 방식의 소설들로 다루고 싶어했고요. 제 소설들을 읽어주신 분들과 그 암중모색을 나눌 수 있었던 것에 작은 의미가 있었기를 빕니다. 요즈음의 저는 생명 자체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품고 솟아나는 것들에 관심이 생깁니다. 다음 소설에서는 그런 생명의 감각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생각하고 서성이고 고민하고 질문하고 길을 잃고 우회하고 되돌아오고…. 그런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고 지금도 느낍니다. 그렇게 질문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요.
문학이라는 것이 원래 연결의 힘을 가지고 있지요. 언어는 우리를 잇는 실이기도 하고요. 어디에든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 독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르샤바에 머물던 시기(2014년, 이때 아들 14살/ 2003년 효에게 썼을때 3살. 99년생 추정) 에 읽었던 책들의 목록으로 한정해서 썼던 짧은 에세이입니다. 벌써 10년이 흘러서 이젠 지금의 저와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책은 없네요. 사실 어떤 작가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에게 작가들은 일종의 집합체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다루는 것들에 골몰해 있고, 뚫고 나가려 하는 사람들의 집합체요. 그들 전체의 이미지로부터 깊은 영향을, 때로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읽고 있는 소설 속 사람이 되어보며 자신으로부터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반복하면 자아에 틈이 벌어지면서 투명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경험도 하게 되고요. 그렇게 소설은 여분의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보시는 ‘골방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집필공간으로서의 물리적 풍경이 아니라 ‘쓰고 있는 순간에 선생님께서 보시는 상태의 정신적인 풍경’이 궁금합니다. 누가 지나가고, 누가 말을 거는지,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 심장 속, 아주 작은 불꽃이 타고 있는 곳. 전류와 비슷한 생명의 감각이 솟아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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